여전히 장마비가 내리는 유월의 흔한 중학교의 교실. 우산이 없는 몇명이 곧 그칠 듯한 기미를 보이는 비가 곧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교실에 앉아있었다.
신라도 그 무리 중 하나였고, 이자야는 우산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처럼 교실에 앉아있으면 여기저기서 원하든 원치않든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명목하에 교실에 머물고 있었다. 이야기 상대가 있는 김에 신라와 이자야는 몇 마디를 나눈다.
그 와중에.
"나도 갈래."
드물게 이자야가 매력적인 눈을 밝히며 신라에게 승인하라고 요구해왔다.
"상관없지만, 정말 책 사러가는 것 뿐인데?"
금방 "하하, 너랑? 사양할게."하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러련, 하고 수긍하는 모습에 이자야는 어색함을 느껴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어라, 거절하는 쪽이 좋았어?"
이자야가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럼, 됐어. 하고 신라는 교과서를 몇권인가 가방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내일봐, 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그의 그녀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달려 사라진다.
기대된다. 이자야는 내일의 약속에 기분좋아했다. 친구와 하는 첫외출로써 기뻐하는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사람은 옷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신라가 그녀에 대해 그은 선이상 말하지않는 것이 단정한 제복을 입고다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사복을 입으면 뭐라도 하나 더 뱉지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잠시후, 이자야는 확실히 자신이 들떠있다고 단정짓는다. 가방을 둔 채로 우산을 나올 뻔했기 때문에.
다음 날, 한동안 내리지않던 비가, 공기중 습기가 최고조가 되었다고 알리듯이 물방울을 터뜨려 솨아아하는 소리를 내는 비를 내렸다. 책 사기에는 그렇게 좋은 날씨는 아닐지도. 이자야는 우산을 들고, 약속장소 근처의 문닫은 가게의 처마밑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그나마도 비를 다 가려주지 못해서, 그의 파랑색 우산을 들고 있어야 했지만. 마음에 드는 후드티였는데, 비가 튀어 옅은 회색이 점점 짙어져온다. 눅눅해옴을 느끼며 그의 친구라고 부를 수있는 유일한 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신라는 이미 약속장소지만. 처마밑에서 얄미운 비때문에 눅눅해진 후드티를 보며 분명 속으로 툴툴대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의 두번째 친구를 바라본다. 눈치챌 때까지.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며, 하하, 정말 고개한 번 들지도 않는구나, 이자야는. 기다림에 지친 신라가 가까이 갈 즈음 막 고개를 든 이자야와 눈이 마주친다.
"왔어?"
진즉에. 하고 대답하자 우산 두개가 나란히 시내를 걷기 시작한다.
"이자야." "응?" "우린 구면이였어?"
신라의 묻는 의도야 이해했지만, 신라가 원하는 답에는 부정만이 있었다.
"어제도 봤잖아?"
부드럽게 넘기자, 그게 아니라…하고 말하려던 신라는 고개를 돌려 이자야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그래,그랬었지.하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덮는다.
"비가 오니까 볼 일만 보고 돌아갈거지만."
"아, 그렇게 해. 따라나온 거 자체는 후회 안해."
좋아하는 후드티를 입고나온 건 조금 후회일지도, 하고 덧붙이는 이자야.
신라가 책을 고르는 동안 이자야는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루하지않냐고 물었을 때 "전혀."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는 신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평소에도 단정하게 입는구나. 어딘가의 교복같아보이는 반팔의 와이셔츠 상의를 보며 이자야는 생각한다. 이래서는 뭐라도 들을 순 없겠구나하고 씁쓸히 웃어볼까 할때 신라가 고개를 든다.
"이걸로 하려고."
세권의 책을 집어든 신라는 계산대로 향했다. 게으른 종업원이 어물쩡 어물쩡 바코드를 찍어 종이봉투에 책을 담을 때 신라가 다시 한 번 이자야에게 묻는다.
"정말 마주친 적 없어?"
"난 계속 이 거리에서 살았으니까 한 번쯤 마주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버스 안이라던가."
그래, 하고 종업원에게서 종이봉투를 받아든 신라가 문을 연다. 확실히 이자야 네 외모는 한번 보면 잊기 힘들지. 하핫, 그거 칭찬이지? 왠일이야? 이자야가 싱글싱글 거리는 것을 뒤로 한채 우산을 펼쳤을 때, 투둑투둑하고 날씨 상태를 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울리지 않음을 확인한 신라는 하늘을 바라본다.
"응? 비 그쳤네."
하늘이 개었다곤 할 수 없었지만 비는 확실하게 그친 상태였다.
우산을 다시 접어 걷기 시작한다.
"어디라도 들리자."
이자야가 제안한다. 급한 일도 없고 그렇게 하자하고 신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만났었던 장소를 지날 때, 이자야가 처마를 빌렸던 가게가 셔터를 위로 올리고 가게 문을 연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옷가게 였구나. 몰랐었네."
"아……." "신라?"
쇼윈도우에 비치는 자신과 이자야의 모습을 보더니 신라는 떠올려낸다. 그리고는 픽하고 웃어보인다.
"우리 만난 적 있어."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즈음 이였을걸. 동거인의 부탁으로, 누군가가 떨어뜨린 지갑을 경찰서에 맡기러 갔을 때, 길 잃어버린 걸로 보이는 꼬마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가 한참 울고있었어. 그 때,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그 여자애랑 아주 판박이인 여자애 손을 잡고는 경찰서 밖에서…투명한 경찰서의 유리너머로 한참이나 그 여자애가 우는 걸보고 있는거야.
"아아……. 기억났다. 마이루가 길 잃어버렸을 때구나. 네가 있었는 지는 잘……."
나라고 그렇게 세심하게 다 기억하는 편은 아니야. 네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을 신경쓰는 편은 아니니까. 그냥,
"그냥?"
그 때, 네 여동생이였을 아이마저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네가 너무나 신기했었으니까.
"……."
이야기를 죄다 듣고난 이자야는 신라의 얼굴을 살피며 표정을 알아맞추려고 애를 썼다. 무슨 변덕에 그 꾹 다문 입을 열고 있는 걸까. 그의 동거인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렇게 열심히 되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것이 또 자신의 이야기라서 이자야는 의아해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다.
관조의 눈……. 뭐, 초등학생부터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나도 정상적이진 못하지만, 그걸 알아채는 신라도 이상한거 아니야? 말하려던 것을 목안으로 삼키면서 지금은 그냥 듣고만 있자라고 이자야는 생각한다. 둘 다 보고있지는 않지만, 구름은 점점 개이고 있었다.
"너 그때, 네 인상착의 기억해?"
신라가 이자야에게 묻는다. 기억할거라고 바라고 묻는 물음은 아닌 듯 했다. 역시 이자야는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옷 차림 하나하나 기억할 정도로 병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래서 대답한다. 아니, 기억못해.
"회색 상의에……. 네 여동생은 우산을 질질 끌다시피 했어. 파란색 우산이였지."
신라가 말을 끝내자, 이자야는 물론 그 때의 것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파란색 우산과 회색빛을 내고 있는 마음에드는 후드티를 바라본다. 아, 그래서 기억해낸건가 하고 수긍해보이며. 인간의 기억은 참 신기하구나. 그런 거 까지도 기억할 수 있다니.
"징그러, 신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고는 서로 마주본다. 이자야가 드물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분좋게 웃어보이고, 신라는 눈꼬리를 휘고 입을 살짝 울려 솔직하게 웃어보인다.
해가 뜨기 시작한다. 어딘가에 들리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었지만. 두사람은 그대로 헤어졌다. 오늘은 여운이 필요하다고. 각자 그렇게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