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론 일주일 정도 지난 것같다. 달력을 보면 알 일이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진작에 안대를 풀고 학교에 향했고 나는 눈도 시큰거리는 김에 좀 더 집에 붙어있기로 했다. 이러고 있으면 안되는데… 게임기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벌써 적응했다는 거 아닌가. "하아." 몸을 돌렸다. 천정을 마주하지만 보이는 건 게임기 안의 화면 뿐이었다. 사실은 이 고약한 환영 속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건가. 자신에 대한 화가 날 정도로 무력했다. 자해도 해보았다. 서린 녀석이 보고는 경악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러지 말라고 악을 쓰는 꼴마저 보았는데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도어락의 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열린다. 신경쓰지 않고 A버튼을 연타한다. 이게 꽤 재미있다.
"형, 나왔어."
곧 이쪽 방문이 열리고 익숙하게 동생이 들어왔다.
"형, 약은 발랐어? 뭐야, 그대로네. 안 발랐구나?"
"안 발라도 나아."
오히려 이 아픔이 환영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유일한 것이고 나아서는 곤란하다. 서린의 완전히 돌아온 갈색 눈동자를 보면 그렇다. 익숙하지만 이질적이다. 서린이지만 내가 아는 롯시니는 아닌 것이다.
"게임 잠깐 꺼봐. 내가 발라줄게."
"내가 이따 바른다."
"안 발랐으니까 내가 발라준다는 거 아냐. 귀여운 동생이 직접 발라준다니까."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 귀여운 동생이야. 시커멓게 다 큰 놈이 지 입으로 귀엽다 귀엽다, 해대는 게 꼭 내가 잘 아는 서린을 빼닮았다.
"나 씻고 올 동안 발라야 돼. 알았지?"
어, 건성으로 대답하고 B버튼으로 대시했다.
내일은 깔개 이불을 얇은 걸로 갈아야겠다. 부쩍 더워져서 등과 허리에 금방이라도 땀이 맺힐 것같다.
보고 있는 작은 화면에 선택지가 뜬다. 쥐약이었다. 예지가 있을 때 내가 하는 선택은 최상의 선택이었는데.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답이 나오겠지만 귀찮아서 대화를 스킵한 탓에 뭐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수가 없이 로그를 올려 읽고는 선택을 한다. 그러자 마지막 관문이랍시고 열쇠를 내놓는다. 망설일 것없이 진입하자 방문이 열렸다.
"발랐어?"
아니. 대답하지 않고 화면에 집중했다.
"안 발랐네."
그대로 놓인 약통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거 몇 시간 늦게 바른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어제도 안 바르고."
그랬나? 그랬던 것같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덮고 서린은 책상 위의 약통을 집는다. 가까이오는데, 나 바쁘니까 안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서린은 성큼성큼 걸어와서 기어이 침대에 자기 무게를 옮겼다. 뭐하나 싶어 곁눈질 하면서도 게임에 집중하고 싶어 무시했는데, 게임기너머로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쏘이자 더는 그럴 수가 없어서 일시정지를 해놓고 짜증스레 서린을 마주했다.
"뭐냐?"
"약바르게. 눈 감아봐."
더 말하려다가 그냥 발려주고 말지 싶어 눈을 감는다. 뚜껑이 열리는 소리. 손가락이 눈가에 닿는 대신 입술에 무언가가 닿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살포시, 가볍게 놓여진 게 손가락이 아니라는 듯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그러나 곧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눈가에 차가운 감각이 시원하게 밀려왔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서린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안을 나갈 때까지, 나는 그냥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이상했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게 없었다. 다만, 요며칠간 본 서린의 얼굴만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