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그 혈흔을 정리하고 온 서린이 초조해보였다.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친 눈이 아프지도 않은지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때리고 마우스 휠을 거칠게 돌리는 모습에 서린은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네 형이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구는 이는 아니었고 동생을 때렸으면 때렸지, 자해하는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눈 왜 그랬어. 그렇게 가려웠어? 혹시 모르니까 병원가보자, 응?"
서현의 뒤로 향해 어깨 위에 손을 슬며시 올렸다. 그러자 서현은 아주 경멸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서린을 노려보다가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탁, 쳐낸 것이다. 징그럽게 왜이러냐는 반응은 예상해도 설마 내쳐질 줄은 몰랐다. 파리를 쫓아낸다고 해도 그렇게 사납게 내칠 리가 없었다.
서린이 무슨 심정으로 방을 나갔는지 서현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서 빠져 나가지 않으면 롯시니가, 서린이 위험할테다. 그뿐인가. 그 장소에 있었던 이들은 물론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방안 공기가 그리 더운 것이 아닌데 머리에서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눈에 난 상처 때문일까 머리도 핑 한바퀴 돌았다. 의자에 몸을 쭉 기대자 찌기긱하고 플라스틱이 울어댔다.
"하…"
돌아가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가. 죽을 정도로 손목을 그으면? 혹시 여기서의 죽음이 바깥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라면? 두려움이 머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나갔다. 그걸 부수기 위해 눈을 감자, 본의아닌 잠이 그토록 쏟아져 내렸다.
꿔서는 안 될텐데, 꿈을 꿨다. 새하얀 눈밭. 등을 돌리면 분명 새빨간 피가 여기저기 뿌려지고 고명이라도 되듯 시체가 올려져 있을게 뻔했다. 아아, 이걸로 현실로 돌아가자. 그대로 뒤로 돌았을 때, 현실은 커녕 분노만이 치밀었다. 서현이 보고 컸을 리가 없는 어린 서린의 모습이 눈 앞에 있었다. 손을 붕붕 흔들면서 손에는 눈뭉치도 쥐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서린이 서현을 향해 눈을 던졌다. 서현의 눈에 매우 느리게 날아왔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퍽, 하고 가슴팍을 쳤고 서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대다가 서현이 허리를 숙여 눈을 한움큼 집어내는 걸 보고 도망을 갔다. "아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노만이 온전하게 자신의 감정일텐데. 그와는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눈을 뜨자 여전히 한국의 평범한 가정주택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자신의 것이 아닌 팔이 스르륵 가슴팍에서 허벅지로 떨어지기에 옆을 쳐다보니 서린이 같이 누워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따스한 느낌을 받는다.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서린의 귀끝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손은 치울 수 있었지만 시선은 치울 수가 없었다. 서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의 과거정보들이 머리를 향해 들어왔다. 눈을 피해야할텐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동생 롯시니. 항상 상상해오던 평화. 고개를 젓는다. 온 사방이 적이다. 옆에 누운 서린도, 아니 그가 제일 위험할테다. 있지도 않은 추억을 머리 안에 꽂는데 그만한 것이 없었다.
자, 나갈 방법을 찾아야지. 강구해야지.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른발을 바닥에 닿도록 하고 왼발도 마저 바닥에 맞추려고 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왜? 발목에 느껴지는 압박감에 발목을 쳐다보자 쇠고랑이 자연스럽게 거기에 있었다. 아, 그리고보니 서린이, 언제부터였을까. 한세건 그 작자랑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씩 생겼던 것같다. 쇠고랑 반대편이 쇠고랑이라면 마땅한 기둥도 없으니 쉽게 뺄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사실 그가 라이칸스로프이기만 해도… 애석하게도 인간이었다. 사슬의 끝은 천이었다. 물어뜯으면 뜯기기야 뜯기겠지만 저긴 분명 뭔가가 발려져 있을테다.
"아 형, 깼어?" "이거 안 풀어?" "나도 인도적 차원으로 그냥 정신병원에 신고할까 했지... 저희 형이 갑자기 화장실에 급하게 달려가더니 눈을 팍...! 돌은 거 맞죠? 빨리 데려가 주세요. 근데 세건형이 나같음 묶어둔다고 하잖아." "묶는 건 네 취미겠지!"
아차, 안되는데.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깥의 정보가 모래처럼 손 안을 빠져나가고 만다. 하아아, 한숨을 푹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형, 눈 정말 괜찮아?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병원 간다고 하면 풀어주고…"
우스운 해프닝을 벌이긴 해도 서린은 어지간히 그 형이 걱정이었다. 이렇게 대화하면 또 자기 형이 맞는 것같은데 그 날카로움이 평소보다 몇 배는 서있어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서현을 고개를 올려 서린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서린의 안대를 치웠다. 자신과 똑같이 충혈된 눈… 이거 내 눈알도 뽑겠다고 긁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나서 서린이 서현의 손을 치우고 안대를 도로 내렸다.
"이제보니 형 변태구나? 후 이런 거나 보고 싶어하고…"
서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혼자 생각에 빠진다. 바깥도 되도록이면 나가고 싶지 않다. 형제끼리 사이좋게 안대로 눈 한짝씩 가리고 나다니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아, 이게 아니다. 자신이 나가기 싫은 이유는 더 많은 정보가 머리를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젠장, 입으로 욕이 툭 튀어나왔다. 서린의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뺨이 뜨거웠다.
"형, 열있는 거지?" "너 지금 나 놀리냐?" "아니아니, 생살에 좌악, 멋지게 그었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있어? 그리고 병원 빨리 가보자. 아까 내가 너무 놀라서 자기에 그냥 재웠는데… 혹시 그 눈 다시 못 쓰게 되면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발목이 묶인 채로 침대생활은 사양이다. 알았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서린이 휴대폰을 집고 몇 번 두드리다가 자기 귀에다가 가져다 댄다.
"어, 엄마. 형 간대. 응. 어, 아직 묶어놨는데… 엄마 오면 풀자. 그치… 사춘기 때도 안하던 짓을 해서 온 가족 걱정이나 시키고… 아주 또라이야, 또라이.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