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백
현패러
카가치 - 호오즈키
시라사와 - 백택
카가시라, 鬼白
날조설정. 아무래도 좋으신 분만.
1 : http://aoenel.tistory.com/86
가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등교를 했다. 카가치는 똑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오는 편이었고 시라사와 역시 카가치의 시간에 맞춰서 육교 앞에서 꼭 기다리고 있었다.
지내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아침에 마주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까지 카가치는 시라사와와 함께였다. 자연스레 시라사와에 대해 카가치는 알아가게 되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할머니가 중화계이기 때문에 간단한 중국어를 할 수 있다거나, 집은 한방약국을 하고 있다거나.
손끝에서 복숭아 단내가 난다거나.
시라사와가 고집스레 카가치를 집에 데려갔을 때 그의 방안에서 온통 복숭아향이 났다. 향수도 방향제도 뿌리지 않았다고 하기에 복숭아 향이 어디서 나는지 찾은 결과는 시라사와의 손끝이었다. 복숭아 단내가. 이따금 손장난을 치고 있자면 그 달큰한 향이 카가치 자신에게 옮기도 했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시라사와는 자신의 손끝에서 난다는 복숭아 향을 맡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카가치의 착각이라는 결과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몇 번을 맡아도 그 향기는 오롯하게 진해서 착각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병에 걸린 건 아닐까요. 자신이 다소 걱정스러웠다.
“그런 건 아닐거야.”
시라사와는 카가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내게 있어서 카가치가 특별하다는 증거야.”
새큼한 과일의 향기가 후각을 녹여 달랬다. 얼굴이 다소 뜨거웠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카가치가 하던 걱정은 깨끗하게 씻겨나가 이윽고 하수구로 떨어졌다.
그런 사랑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 배정받은 반은 서로 달랐다. 대개 어린 아이의 마음이 그렇듯이 카가치는 금세 그 단 향기를 잊을 수 있었다.
카가치도 시라사와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아직 겨울의 향기가 두텁게 남아있는 공기 아래에서 카가치는 시라사와의 소매를 잡았다.
“좋아합니다.”
어디서 어느 시간에 말할 지는 정했지만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쉽사리 나온 말에 카가치 자신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시라사와는 조금 놀란 눈을 하더니 금세 답해주기 위해 입을 빠끔거렸다.
“나도 카가치를 정말 좋아해.”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시라사와는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뒤를 메꿔 넣었다.
“하지만 나 오래 전부터 계속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카가치랑은 계속 친구이고 싶어. 실연이었다. 슬퍼해야하는 부분이었는데 마음 한켠에 깔끔한 기분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바람만은 유난히 차게끔 느껴졌다. 머리는 한없이 차갑고 냉정해질 수 있었다.
“응원하겠습니다.”
“고마워.”
봄이 오기도 전에 첫사랑이 끝났다.
*
좁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도 마주하는 얼굴들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시라사와와 카가치도 같은 학교였다. 다행스럽게도 반은 다른 채였다. 도대체 어디가 다행이라 생각되는 건지 카가치는 자신의 무의식을 꾸짖었다.
반은, 달랐다. 하지만 시라사와의 소문은 초등학생 때 그랬듯이 꾸준히 들려왔다. 아주 사소한 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해대고 다니는 건 사생활 침해 아닙니까. 고소당합니다.’ 반의 시끄러운 녀석이 다른 놈에게서 들은 시라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여학우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카가치는 조금 못마땅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시라사와가 드물게 매점에서 빵을 사먹은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기에는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시라사와의 귀에도 카가치의 이야기가 닿았다는 점이었다. 카가치도 충분히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본인에게는 어지간히 귀찮은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학급 내에 회장 선거가 있었다. 카가치는 이런 귀찮은 일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변덕으로 부회장에 지원했다.
그 날 저녁은 외식이었다.
다음 날 각 반의 간부(중학생인데 이렇게 부르는 것도 상당히 우습다. -카가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임에서 시라사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반의 회장 역으로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한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실연을 했음에도 원망스럽기는커녕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좋아한다는 사람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복숭아 향이 날까. 자신이 이런 것을 궁금해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걸 마냥 무시하지 못할 뿐이었다.
시라사와가 혹시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일정이 마치자 금방 해산한 탓에 그런 일은 없었다.
1학기 내내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봄 소풍이나 운동회 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있었지만 당초 1학년은 학생회의에 끼워주지 않기도 했으며 학교행사 이외의 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고 대화를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2학기에 접어들어 2학기의 학급회장선거가 있었다. 당연히 입후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2학기에 접어들어서는 시라사와의 이야기가 잘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드디어 초등학생을 졸업하여 다른 이의 프라이버시를 존중―아니, 단순히 남의 일에 무관심해진 것이다. 시라사와는 어떨까. 다른 이에게 그렇게 상냥하던 사람이었다. 카가치는 초등학교 시절 우산을 기어이 씌워주던 시라사와를 떠올렸다.
학교 안뜰―본관과 별관 사이에는 온실이 있었다. 늪에 가깝다시피 이끼가 낀 수조마냥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온실은 악취가 나지는 않았다. 1학기 까지는 그랬다. 안뜰을 지날 일이야 몇 번이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서나마 보는 온실은 상당히 관리가 되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입사귀가 보이던 곳이었다. 2학기의 어느 날. 카가치의 눈이 온실을 향했을 때, 투명한 강화유리 안으로 푸른 잎이 그득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기심. 온실의 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걸 본 카가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곧 겨울이 가까워지는 바깥공기의 차가움과 대비해 온실 안은 포근했다. 따뜻했다. 그 공기에 풀 향기가 묻어났다. 이곳만큼은 겨울이 오지 않을 테다.
온실은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들어서는 순간 한 눈에 공간 전체를 볼 수 있는 크기 정도였다. 교실보다 적다. 계단이나 틈이 있는 구석구석에는 화분을, 평지에는 벽돌을 쌓고 흙을 채워 넣고 작은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남은 공간에는 창고에서 남는 것을 들고 왔는지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가 있었다. 책상 안의 서랍에는 원예 책 두 세권이 들어가 있었다. 그 폐허 같던 곳이 여기까지 변하기도 하는구나. 카가치는 이 공간에 감탄을 했다. 여기까지 확인 했을 때 카가치는 따뜻한 공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카가치?”
“시라사와씨.”
공간에 감탄하는 것을 관두었다. 이 남자가 가꾼 공간이다. 변하지 않을 것도 없었다.
카가치가 온실에 들리기를 세 번 쯤. 책상 옆의 의자가 하나 늘어났다. 카가치의 의자였다. 시라사와가 오전 중에 가져다 둔 것이었다.
“그리고 보니 카가치랑 같이 등교하지 않게 된 이유가 뭐였더라.”
중학 등굣길에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으니 초등학교 때의 이야기만 하는 것일 테다. 4학년이 시작함과 동시에 카가치는 아침청소 당번이 되었다. 20분 정도 일찍 나가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시라사와와는 같은 시간에 등교하기가 힘들어졌다. (시라사와는 잠이 많은 편이었다.) 카가치는 그 시간대의 등교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시간대를 다르게 하지 않았고 시라사와와 등교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하교를 같이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그지. 하면서 시라사와가 후후, 하고 웃어보였다. 의자에 반대로 걸터앉은 채로.
“온실 열쇠, 복사해서 줄까?”
카가치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카가치는 온실 열쇠의 사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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