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따라 기분이 나빴다거나, 예감이 안 좋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마여서 비야 당연히 내리는 것이었고 마을 일손을 돕는 것도 순조로웠다. 그 날 하루종일 시온과 마주치지 못한 점은 어리둥절했지만 내가 그와 하루이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하다 여길 관계는 아니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하루가 지나면, 다음 날에는 시온도 그의 아버지도 볼 수 있을 테고 그게 정상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굵은 물줄기와 시꺼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곧 천둥이 시끄럽게 귀에 내리 꽂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빗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종이를 찢고 구겨서 창문틈새를 꼼꼼히 막고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종이는 시온의 집에서 버리는 걸 나눠받은 것으로 읽어봐야 알 수 없는 요상한 기호들이 가득했다. 나가 봐야 소용이 없는 날이었다. 점심 때 날이 갠다면 시온을 보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창문틈새로 기어이 들려오는 빗소리를 즐기고 있자, 쾅쾅쾅, 천둥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다급한 소리가 귀에 꽂혔다.
나무 문을 열고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살폈지만 시선 아래로 우산이 보였다. 그리하여 허리를 굽히면 시온이 서 있었다.
"시땅, 무슨 일? 놀러 왔어?"
"내가 너랑 왜 놀아? 그런 거 아니고..."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괜히 불안해 보였다. 아무리 감정표현이 적다고 해도 시온은 이상할 정도로 적은 게 아니라 표현이 서툴어서 그런 것 뿐이라 어느정도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면 금방 눈에 보이는 어린애였다. 우산대를 작은 양손으로 꼭 쥐어들고는 내 뒤를 살폈다.
"그 녀석... 여기 오지 않았나 해서..."
"R맨? 아니, 안 왔는데?"
"숨기고 있는 거면 죽일 거야."
"살벌하게!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일 아냐. 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작은 입이 움직이더니 혀를 찼다. 그 행동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더니 노려보고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도 날이 개는 일은 역시 없었고 심심한 탓에 작은 공작을 하다가도 날이 어두운 탓에 눈이 아파 창문만을 바라보다가 시온을 발견할 때까지는. 왜 아직도 우산을 들고 걷고 있는 걸까. 그 때부터 안 좋은 기분이 등을 껴안고 스멀스멀 가슴을 타고와 목까지 조여댔다. 우산을 쓰고 밖을 나가 시온을 찾았다. 아침부터 걸어댔으니 몸이 싸늘한 게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시땅, 비오는데 춥게 왜 그래. 들어가자, 응?"
"크레아."
어깨를 잡자 오들오들 떨렸다. 빗 속에서 체온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우는 탓인지. 시온의 불안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버지가 안 보여."
그대로 우산을 놓치고 얼굴을 가려버리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가슴팍으로 밀어넣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온의 집에 가자 뭔갈 챙겨 나간 흔적은 없었다. 아저씨 성격대로의 방이었다. 널부러져서 뭣하나 정리하지 않은 서류와 책들, 플라스크는 기어이 깨진 것이 보였다. 다만 옆에 있는 침대만큼은 시온이 정리해서 깔끔해서 금방이라도 누워서 잠을 청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응, 말 안하고 나간 게 하루이틀은 아니니까, 걱정말고 조금 더 기다리자? 말 못하고 금방 뛰쳐나갈 정도로 큰 발명을 했을 수도 있잖아?"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옷을 벗기고 몸을 좀 닦아주려고 했더니 애취급하지 말라는 차가운 눈길이 금방 뺨에 달라 붙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을 시온을 위해 스프라도 끓이려고 부엌을 살폈다. 싹이 나기 시작한 감자 몇 알만 눈에 보였다. 장마철이니 어쩔 수 없지. 퍼렇게 변하기 시작한 부분을 도려내고 으깨어 물에다 재운 뒤 소금만 쳤다. 스프라고 말하기에도 씁쓸하고 묽은 게 접시에 담겼다. 식탁에는 끝이 말라 버린 빵이 있었지만 상하거나 뭔가가 피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만족했다. 시온을 자리에 앉히고 반대쪽에 내가 앉았다. 묽은 스프를 마시던 시온은 뭣 때문인지 울음을 터뜨렸다. 최초의 비명과 같은 울음 뒤에, 그는 애써 숨을 죽이며 빵을 씹었다.
실은 아저씨가 보이지 않은 게 나흘이나 된다고 한다.
일주일이 지나자 비는 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온이 곳곳을 뒤지면서 그를 찾는 탓에 이 좁은 마을에 그 정도 모를 이는 없었다. 어린 그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평소 이상의 친절을 보이는 것으로 그를 위로하는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시온의 집을 찾아가는 나도 시온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친절과 별 다를 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얼굴을 내비치는 것은 시온과 함께 아저씨가 걱정되는 마음이었다. 아저씨의 소식 끄나풀이라도, 아니 돌아왔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의 소식을 제일 듣고 싶은 게 시온이겠지만 그 다음으로 듣고 싶어하는 건 나라고 확신했다.
"크레아, 자고 가."
친절로 먹을 만해진 스프와 딱딱하지 않은 빵으로 저녁을 마친 시온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방에서 자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그가 불안한 상황에서 내게 보이는 응석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승낙하자 기분 나쁘다며 역시 돌아가라고 툴툴 댔지만 그릇을 씻은 다음은 그의 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바닥에 이불이 한 장 더 깔려 있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에 침대 위에 베개가 하나 더 있을 뿐이었다. 비좁은 침대에서 그 날은 시온을 꼭 껴안고 잠들었다. 가슴팍이 축축하게 그리고 뜨겁게 젖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꿈 속으로 떨어뜨렸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아침 느꼈다.
시온도 나도 양친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린 것이다. 시온과 내가 온전히 가족이라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책임질 동생이 생긴 것이다.
"시땅."
"뭔데?"
"내 집에서 살자."
아저씨조차 없는 이 집은 너무 넓었다. 원래 4인 가족이 살던 곳이었고 아저씨는 한번도 그녀와의 방과 그의 물건을 정리한 적이 없으니, 이제야 혼자인 시온이 견디기에는 아직 그가 어리고 집과 짐은 컸다. 그렇다면 다소 좁을 지라도 몇 달간을 내 집에서 보내면 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가 아직 작은 시온에게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기에 딱 좋을 지도 모른다. 아직 망설이는 듯한 시온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낙했다.
마을사람들은 우리가 그 큰 집을 버리고 같이 사는 것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좋은 사람들은 딱히 집이나 땅을 탐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몇 달이고 아저씨의 집은 허물어지지도 도난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먼지가 소복히 쌓일 즘에는 시온이 꼭 들러서 하루종일 쓸고 닦았다. 다만 연구용 책상은 깨진 플라스크 그대로 먼지가 쌓여갔다. 무슨 연유인지 그대로 두고 있었다. 이불은 매번 빨고 널은 다음 개어두면서도 책상은 치우지를 않았다. 거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부친이란 어떤 거였더라. 내게도 내 아버지보다는 아저씨의 인상이 더 강했다. 시온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그 큰집을 나왔다.
한편, 우리 집의 이야기를 하자면 두 달간은 내 방 안에 시온의 물건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세달 쯤 되어서야 시온과 내 방을 구분 짓자는 생각을 했고 판자를 구해다가 박았다. 좁은 공간을 나눠 쓰면서 문은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때 마을 어르신이 미닫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어서 열고 닫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시온에게 머리를 맞았다.
"크레아."
식사 도중 시온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딱히 대답의 필요는 없는 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수저안에서 형태를 만든 콘포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콘포타주가 이렇게 뻑뻑한 줄 몰랐어."
"음움, 물을 좀 더 넣을 걸 그랬나?"
"아니, 두 사람 분을 만들어도 항상 묽었거든."
이상하지? 시온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뭐가 갑자기 불안해진 나는 나무수저안에서도 흔들거리는 콘포타주를 보이지 않으려는 듯이 급히 입안으로 넣었다. 입천장이 뜨거웠다. 그 이상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아저씨는 일을 잘 하지 않았다. 시온이 일손을 돕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언젠가부터 서서히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 이외에는 나나 시온과 헛장난질을 하며 놀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애당초 그는 누군가에게 쓰여질 인목도 아니었다. 시온이 하는 일로 성인 남성까지 부양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 대부분 주변에서 받은 것과 함께 배를 조금 주려가며 끼니를 채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어도 경제적으로 궁했다. 나는 내가 그리 좋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온의 팔에 어째 살이 붙은 것같아 보이는 게 제발 착각이거나 아니거나를 바라며 바늘이 돋아난 혀를 앞니에 긁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기를 두번 더 지나 시온이 13번째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평범한 둘만의 일상인데도 시온의 생일 날, 우리는 한 없이 예민했다. 아침부터 말싸움을 해댔다. 오후가 지나서 나는 다짜고짜 시온의 손목을 잡아 뒷산을 올랐다. 삽으로 땅을 파 뒤집는 꼴을 아니꼽게 쳐다보던 그였지만 내가 상자에서 사과묘목을 심는 걸 보고는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손을 잡고 화해했다.
"시땅."
러브앤피스가 그려진 목걸이를 시온의 목에다가 걸어주고는 내일 떠나자고 제안했다.
시온은 아침과는 다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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