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일까,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눈에 비쳤다. 소년은 붉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망설임없이 들고 있는 검을 내리찍었다.
"허억."
"쳇."
몸을 굴려 그 일격을 피하자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두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한번 땅을 찔렀던 검은 흙을 뿌리며 시야를 어지럽혔고 그 사이로 소년은 거리를 좁혀 들어와 나를 베는 전제하에 몸을 움직였다.
"잠깐,잠깐,잠깐!"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검은 소년이 들기에는 다소 커다란 것이었기 때문에 휘둘러지는 시간동안 몸을 뒤로 뺄 수 있었다. 역시라고 해야할까 내 만류에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고들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소년의 한쪽 팔을 아프도록 쥐어돌렸다. 한 팔만으로 들기에는 검은 꽤 무거운 것인지 한 손으로 버티는 것도 잠시 소년은 검을 놓치고 말았다. "휴우." 눈을 뜨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실에 안도했다. 소년의 팔에는 더이상 힘이 없었다. 이제야 겨우 대화할 수 있겠다 생각한 찰나 소년의 반대 손에서 빛나는 구모양의 마력덩어리. 잠시라도 확인이 늦었다면 정말 저 세상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미안하게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소년을 마력으로 만든 고리로 묶어두고 내 마력으로 소년의 마력을 제어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소년은 철창에 갇힌 맹수처럼 캬르릉 거리며 몸을 비틀어댔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잘 아는지 무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직 내 허리를 겨우 넘어서는 키에 솜털이 남아있는 피부, 작은 손... 내가 잘 아는 로스의 아직 어린 시절, 크레아시온이었다. 그것도 재차 강조하여 어린 시절. 여행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몸에 걸친 외투는 너덜너덜해도 결은 부드러웠다.
"있지. 난 네 적이 아니야."
어린 얼굴에 도저히 지어질 것같지 않은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믿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야 묶어두고 마력도 누르고 있는 어른이 소년에게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이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소년을 묶어둔 마력을 회수하자 소년은 손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리번 두리번 내 눈치를 살피며 검을 찾는 듯 했다. 그 검이라면 여기 있어. 하고 손가락으로 내 등을 가르키자 크레아시온의 마력이 순간 막고 있는 내 마력을 압도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틀어막을 수야 있었다. 로스, 고마워. 이것저것 가르쳐 주어서. 네가 가정교사 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죽었을거야.
"정말이야. 나는 조금 먼 곳에서 용사를 하고 있어."
이거라면 거짓말은 아니고, 크레아시온이 납득해주지 않을까? 최선의 말이었지만 소년은 여전히 믿어주지 않았다. 그게 정말이면 검을 이리로 내놓으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러면 죽이려고 할 게 아니냐 물었더니 아까와 같이 혀를 찼다.
그의 검은 타협에 타협을 걸쳐 그가 오늘 하루동안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돌려주었다. 자신의 마력을 누르던 억압이 사라지자 크레아시온의 머리 위에 붙어있던 츠쿠르군이 퐁퐁 소리를 낼 것처럼 기묘하게 움직였다.
생명의 위협도 없어졌고 마력을 순전히 돌아가기 위해 쓸 것이라고 그에게 설명을 마치고 게이트를 열기 위해 사고를 집중했다. 돌아가면, 또 시온으로부터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쬘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선 돌아간 이후의 일로 치기로 하고 게이트를 열었다.
크레아시온에게 손을 흔들며 게이트를 통과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소년이. 소년은 치켜든 검을 아래로 내리 꽂았다. 몸을 굴려 검을 피하면 소년은 혀를 찼다. 심각한 기시감에 머리가 아팠다.
재빠르게 아까와 같은 게이트를 열어 도망쳤지만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크레아시온의 파란 츠쿠르군이 요동을 쳤다. 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사고를 포기하고 그를 제압해야 했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게이트를 통과해도 처음 시각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땅바닥에 연산과정을 그리며 잘못된 점을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식사시간을 지난 배가 공복을 전했다.
소지금은 대부분 시온이 들고 있었고, 내 주머니 안의 적은 돈도 천년 전에 유통되는 화폐랑은 차이가 크게 있을 것이었다. 허리춤에 찬 단검이 고작이라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마법도 봉해져있을까 싶은 생각에 퍼뜩 바닥에 불을 지폈더니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불이 일어났다. 이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크레아시온이 검을 드밀어왔다.
"저기, 죄송합니다. 별로 불로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배가, 배가 고파서."
분명 검을 전해주고 헤어졌을 것인데 이리도 빠르게 달려왔다는 것은 역시 위험인자로 생각되어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을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크레아시온은 한심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향해 숨을 토해냈다.
*
여행하지 얼마되지 않은 조그마한 발은 물집이 생기기 쉬운 모양이었다. 크레아시온의 이동속도가 이따금 늦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그의 허가를 받고 신발을 벗겨내었다. 아이의 발은 작고, 보드라웠다. 치료마법을 반복한 탓인지 발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다만 물집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생기는 걸 그만두지 않는다. 아픔을 거쳐서 비로소 어른의 발이 되는 것이다. 붕대로 그의 발을 몇 번 감고, 잘 길들여지지 않는 가죽신발을 손보았다. 다치기 쉬운 까닭은 발보다 신발이 큰 탓도 있었다.
그리고보니 아이는 아직 여행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가 강하고, 크레아시온으로 있기 때문에 요 며칠간 느끼지 못한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몸을 마력으로 해결하고 혼자 경계하며 잠들 그를 생각하자 슬픔조차 느껴졌다. 오리지니아에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자 코마저 시큰거렸다. 그 멀었던 것같은 과거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실에 아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도, 이리 내볼래?"
발의 처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는 별다른 의심없이 손을 내밀었다. 뽀송뽀송한 손에 오래된 상처가 몇개인가 존재했다. 아이에게 붕대감는 법을 천천히 알려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 나름 고맙다는 뜻으로 내 손을 꼭 잡아왔다.
*
어느 날 아침 든 생각. 그렇다, 여기는 천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게이트를 열 때한 계산이 잘못되어있는게 당연했다. 그러니 몇 번이고 다시 그 시간대로 가는 게 분명했다. 국자로 스프를 몇 번이고 휘휘 저으면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혹시나 모를 실수를 대비해 수식이 맞는지 검산한 뒤에 저녁에는 돌아가야지.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레아시온이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면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크레아시온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공기가 차가워진 탓이었다. 상체를 움찔거리던 소년은 이윽고 재채기를 했다.
마법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있지만 이동 중에도 줄곧 그럴 수는 없는 탓이라 감기기운이 충분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한 아이가 감기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걸리기 전이라면 모를까, 걸린 병에 대한 치료는 꽤 손이 가는 것이라 그를 설득하여 오늘 하루는 용사휴업일로 정하였다.
가까운 마을에 가면 좋을텐데 취급이 귀찮다면서 뾰로통한 소년은 모포 위에 되누웠다. 미열이 몸을 감싸고 있어 새빨간 얼굴을 두고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을 몇 번인가 헤집듯 쓰다듬었지만 그 손을 평소처럼 쳐내지 아니하고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이마가 뜨거웠다.
점심 때는 열이 내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잠시 내린 열이었기 때문에 저녁을 맞이하자 다시 이마가 뜨거워졌다. 내일은 혼자라도 근처의 마을에 가서 약을 받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이 없다며 저녁을 거부하는 그에게 다소 자극적으로 달콤한 스튜를 내밀었다. 아이는 솔직하게 접시를 받아들었다. 소화라도 되지 않을까 어깨를 주무르겠다고 했지만 페도필리아라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페도필리아... 솔직히 상처였다.
새근새근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잠든 아이의 곁에 몸을 뉘였다. 평소같으면 질색을 하며 3m는 떨어지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테지만 아프면 사람 손을 타고 싶어지는 건 이 작은 용사님도 마찬가지였다. 관리가 되지 않아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하고 깨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등을 도닥이고 있으면 이상하게 입이 뜻하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온, 열이 내리면 나는 돌아가려고 해."
"어디로?"
"깨웠어? 미안."
"어디로."
"좀 더 자두는 게,"
"어디로..."
무심코 뱉은 말을 없던 것처럼 스러지게 하려했지만 영리한 소년은 그걸 허하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깬 쉰 목소리에서 울음기를 느꼈기에 그를 꼭 끌어안았다.
다음 날 아침, 크레아시온에게서 열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는 시온에게로 돌아왔다. 시온은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는지 태연하게 스프를 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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