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자크가 적의 공격을 피하는 바람에 그 뒤에 서있던 도니타의 스커트가 오물에 축축해졌다. 도니타가 질색하며 비명을 질러 놀란 아이자크가 뒤를 바라보았다. 그것보다는 앞의 적의 처리가 급급했기 때문에 인형은 고개를 저으며 아이자크에게 앞을 볼 것을 명했다. 아이자크가 적을 처리하는 동안 도니타는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치마가 더러워지고 더러운 물이 당연하게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떨어진 오물이 또 한 번 구두에 묻는 것은 정말 싫었지만 그걸 일부러 손으로 쥐어 처리하는 것은 더더욱 기분 나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썩 좋았던 기분이 매질 당해 한껏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아이자크는 그런 도니타를 보며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릴 뿐이었고, 조그마한 인형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지라 조용히 도니타의 뒤를 걸어 거슬리지 않도록 단지 그것만 조심할 뿐이었다.
사과하는 게 맞을까? 슬쩍 물어볼 수 있는 이가 여기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리 이곳저곳을 찌르는 것이다. 만약 사과하는 게 옳다면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반론을 해댈까. 자신이 생각해도 참 답답했다. 그거 한 번 사과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뜸을 들여 자꾸 그녀를 불쾌하게 만드는가. 여성인 전사를 대하는 건 항상 어려웠다. 더군다나 도니타는 한참 까다로워 보이는 눈매를 하고 있는 탓에 부딪히고 싶지 않아 그저 피해 다녔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건 고사하고, 말 한번 꺼내본 기억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찌하면 좋을까.
도니타 역시 아이자크의 탓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탓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자꾸 눈을 흘기기만 하는 것이 답답하고 오히려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단순한 액체는 아니었는지 점점 진득하게 굳어만 가는 오물에 도니타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인형은 결국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인형은 말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의사표현을 위해 종종 누군가의 손바닥에 한마디 두마디를 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했는데, 이번에도 도니타와 아이자크의 손바닥에 ‘4시간 뒤.’ 라고 표현해 정비 후 여기에 모일 것을 알렸다. 평소라면 다음날로 미루었겠지만 아직 달성해야하는 목표가 있는 탓에 아이자크가 항의했지만 인형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니타는 돌아가자마자 탈의를 하고 씻으러가는 것을 택했다. 기분이 안 좋았던 터라 몇 번이고 닦아냈지만 찝찝한 느낌이 영 가질 않았다. 세탁 맡긴 옷 대신 원피스를 입고 방으로 돌아가 머리를 말릴 참이었다. 제대로 된 물품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라 뜨거운 바람만 뱉어내는 기계는 헤어드라이어의 자리를 대신 하기엔 한참 떨어졌다. 이런 것에 까지 투정할 수는 없는 지라 만족하고 기계를 켰다. 단번에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나오는 것이 자칫 잘못 쐬었다가는 머릿결이 상함은 물론이고 약한 피부라면 빨갛게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다른 여 전사의 이야기이고, 인형인 도니타에겐 문제가 없었다. 그 반증으로 같은 처지인 쉐리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기분 탓이라는 사정으로 보통이라면 헤어드라이어의 대체품을 사용하기 보다는 시원한 밤바람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축축함을 날리는 걸 택했다. 다만 오늘은 그 조그맣고 건방진 인형이 일러 놓은 시간이 꽤 가까웠기에 그럴 여유는 없었다. 축축한 상태로 거친 모래바람을 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기는 것이었다. 누가 멀찍이서 이 기기를 들고 대신 말려주고 빗질까지 도와준다면 좋을 텐데. 기대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기기의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뜨거운 바람이 피부에 스치는 것이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기분만의 문제이긴 했다. 도니타가 그리 툴툴 거리고 있을 즘에 노크가 몇 번 울렸다. 자신의 방에 일부러 찾아올만한 사람은 없었다. 닥터가 점검을 예고한 날도 아니었다. 여전히 큰 소리로 돌아가고 있는 기기를 잠시 꺼두고 문을 향해 말했다.
“누구?”
그러자, 오늘하루간은 익숙했던 그 목소리가 답해왔다. 도니타는 목소리의 주인이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쓸데없이 조심스런 손동작으로 열리는 문을 응시하고 있자 예상했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여성스럽게 꾸며진 자신의 방에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변화 없는 차림의 그가 머쓱한지 뒷머리에 손을 대고 도니타를 향했다. 그래도 눈만은 도니타를 마주할 수 없는지 하나있는 그 푸른 눈이 천장을 바닥을 벽면을 바라보기 바빴다.
“방이나 구경하러 온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겨우 도니타를 바라보게 된 아이자크는 입을 몇 번인가 뻐끔거렸다. 도니타는 헤어드라이어의 스위치를 다시 올렸다. 시끄러운 소리로 바람을 뿜어내는 기기의 입을 아이자크 쪽으로 향했다. 따뜻한 바람이 얼굴에 불어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다. 표정도 망가진 것이 웃을 뻔 한 걸 겨우 참았다. 여자의 방에 와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었던 것 정도는 용서해주기로 했다.
“아, 말이야. 아까 일 사과해두려고.”
“응? 무슨 일?”
잊을 리 없었지만 모른 척하고 그를 떠보자면 아이자크의 표정이 숨겨지질 못하고 변하는 게 참 재미있단 생각을 했다. 반면 아이자크는 원래 여성을 상대하는 일은 질색이었기 때문에 이리 새침하게 굴어오는 아가씨는 어찌 대하면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머리 말리는 거 도와줄래?”
새초롬한 눈초리가 아이자크를 찔렀다. 아까마냥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도니타가 건넨 기기를 손에 받아들었다. 도니타는 아이자크에게 침대 위에 걸터앉을 것을 권했다. 침대의 스프링이 제법 퉁겨 묵직한 소리가 났다. 짙고 예쁜 금색의 잘 관리된 사금 같은 머리카락을 차마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들지 않아 장갑 낀 채로인 한 손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았다.
“멀리서 바람만 쐬게 해줘.”
좀 더 뒤로 물러나서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그 큰 바람소리에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아이자크의 손이 도니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뒤집어 안쪽을 말리기도 했는데 닿는 손이 나쁘지 않았다. 거리 덕인지 뜨겁기보다야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이게 하면 황금색이 미끄러져 예쁜 모래알 같았다. 자연스레 도니타가 돌아앉았다. 아이자크는 솔직히 놀라버리고 말 것이다. 연보라색의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그리고 곧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자면, 그런 오후가. 아마도 곧 해가 져 저녁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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