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소리로 아이자크가 대답했다. 생각했던 반응 중에 하나였기에 프리드리히는 슬쩍 웃어보이곤 다시 한번 말했다.
"같이 살지 않을래?"
동거를 권유해오는 그 말에 아이자크는 심장이 벌컥 뒤집어졌다. 권해준 것도 기쁘고 마치 신혼처럼 여겨질 것같은 그 생활은 잠깐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지만 선뜻 좋다고 그리자하작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은 어디로 해요? 보증금 같은 건요? 가구나 식기같은 건 어떻게 하나요? 떠오르는 질문은 한가득이었지만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프리드리히가 이야기를 꺼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건 결정하고 난 다음 의논해도 되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아이자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베른하드씨는요?"
프리드리히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굳힌 폼이 제법 어른스러웠다만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 고민한 다음하는 말이 고작 그것이라니. 김새는 질문이었다.
"야, 인마. 형하고 나하고 나이가 몇인데 못 떨어진다고 고개 젓겠냐? 생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을 달리 할 것도 아닌데. 우리가 너희냐?"
너희라 함은 아이자크 혼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자크와 그 친구 에바리스트, 둘을 뜻했다. 언제부터인지야 프리드리히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이자크 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 친구랑 함께 했고 불만이 없었기에 지금에 와서는 동거라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 멀리 떠나간 적도 없고 아이자크도 에바리스트와 그리 떨어져 지낼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아…."
쓸데없는 물음에 대한 반성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자크는 남은 식사시간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만 미안해진 것이다. 다만 그게 그리 불편하진 않고 귀엽게까지 느껴진 것은, 아이자크의 그 시절이 그대로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아이자크는 항상 불만있는 듯이 꽁한 표정이었다. 수업시간에도 잠깐의 휴식시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복도를 지나칠 때도 에바리스트의 옆에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품행이 나빠서 눈에 갔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수수한 복장이었고 나쁜 녀석들과 어울리며 막나가는 놈도 아니었다. 중하위권의 성적을 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시선을 잡았느냐 물으면, 추잡하게 물들인 색이 아닌 예쁜 금발이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프리드리히가 아이자크가 있었던 학교에는 그런 금발이야 적지 않았고, 예쁜 여학생도 많았다.
그날도 체육실에 비치된 검은 소파에 허리를 기대고 커리큘럼지 작성을 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한 녀석이 싸움이 일어났으니 말려달라고 했다. 제법 허우대 좋은 놈이기에 저가 말려볼 생각은 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막상 보니 누구라도 끼어들고 싶지 않은 싸움이었다. 정말 누구 하나가 사단나야 끝날 것 같은 싸움을 지휘막대로 겨우 멈추고 훈계를 했다. 처분이야 내 영역은 아니었기에 긴 말은 하지 않았다.
눈독 들이던 또래보다 성장이 더딘지 작은 키에 소심한 소년이 선배와 싸우다니. 작은 호기심이 일렁인 건 그제서였다. 아이자크는 저보다 덩치 큰 녀석하고 맞붙어서 전혀 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싸웠던 아벨이야 늘 그런 놈이니 둘째치고 한동안 아이자크 이야기로 교무실이 술렁였다.
아이자크의 처분은 한달간 교직원 화장실 청소였으므로 방과후만 되면 지겹게 마주칠 수 있었다.
"손 씻고, 이따 체육실로 와라."
아이자크라면 무시하고 쌩하니 가버릴 수도 있겠다 각오했지만, 생각 외로 고분고분 찾아와서 불만스러운 얼굴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프리드리히를 내려다 보았다. 아니, 더 분명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하는 건지 시간이 지나가길 마냥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리 있었던 것이다.
그게 계기였다. 하나를 챙겨주고 나면 두개정도 더 챙겨줘야할 것만 같은 게 아이자크였다. 생각과 달리 그는 금방 프리드리히를 따랐고, 사소한 거라도 아니면 일부러라도 변명거리를 만들어 상담을 해오곤 했다.
아이자크가 생각하는 계기는 어느 시점인지 몰라도 프리드리히가 생각하는 계기는 그러했다. 잠깐 그 시절을 떠오르는 사이 아이자크가 식사를 마쳤는 지 그릇을 먼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도 식사를 마치면 아이자크는 먼저 욕실에 들어가 이를 닦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자연스레 TV를 틀었다.
"그러니까 같이 살자는 건데."
아이자크가 듣지 못할 거리에서 프리드리히는 중얼거렸다. 에바리스트의 귀가시간에 맞춰 아이자크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신이랑 실컷 노닥거리는 주말을 보내는 것이다. 솔직하게는 프리드리히는 이게 너무 아쉬웠다.
노닥거리는 주말뿐이 아니라, 평일의 저녁을 가지고 싶었다. 금요일을 묵고, 토요일도 자신에게 죄다 할애하지만 일요일이 되면 돌아가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찾아오는 금요일을 다시 기약하는 게 성가셨다.
연인이 되었고 같은 공간을 쓰는데 전혀 부담이 없다면, 기왕이면 같이 살고 싶은 게 욕심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보다 나이먹은 탓에 안정적인, 가정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걸지고 모르겠지만.
그 일요일 저녁도 어김없이 프리드리히는 아이자크를 자취방 근처까지 바래다주고는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처박아둔 맥주 캔을 흔들었다.
*
"에바는, 나 없이 살 수 있어?"
아이자크가 말을 끝내는 순간 에바리스트는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출했다.
"기분 더럽군. 위에 있는 모든 음식물들이 한꺼번에 올라올 것같아."
그답지 않게 과다한 리액션을 해가며 속을 진정시킨 후 여전히 불쾌해하며 아이자크에게 되물었다.
"주거적으로? 생명적으로?" "후자일 리가 없잖아!"
아, 그래. 에바리스트는 안경을 한번 올리고는 다시 들고 있는 책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아이자크는 어떤데."
질문 넘기기라 생각했지만, 곧 이어 에바리스트는 다음 학기부터는 대학기숙사에 들어갈 것이러고 덧붙였다. 그 짧은 통학시간조차 아깝다고 덧붙였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여유를 만들고파서 통학시간을 아깝다고 말한 것이라고 아이자크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도 아닌 그이가 있는 네가 나랑 여전히 줄곧 붙어있었던 요 2개월간이 이상한 것 아닌가?"
에바리스트는 드디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나라면 이 상황, 질투날 것같은데."
다 읽지 않은게 분명함에도 에바리스트는 책의 페이지를 또 넘겼다. 독서하고 있지 않았다.
"부모도 형제도 아닌 남자가 그녀와 같이 산 전적도 있고 그녀에 대해 나보다 더 훨씬 잘 안다니 말이지."
말의 속도는 빨랐고, 그걸 말하는 에바리스트는 신경질적이었다. 에바리스트가 직면한 상황도 아이자크와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에바리스트의 연애사정이야 아이자크의 관심 밖이었으므로 아이자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들어 프리드리히에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에바는 괜찮대요.' 라고. 거기까지만 쓰고 그다지 나쁘지 않은 머리가 생각해낸 건 자신은 어떻느냐 하는 문제였다.
당연히, 당연히 괜찮지. 이제서야 잠깐 스쳐지나갔던 마치 신혼과 같을 나날들이 머릿 속을 꽉 채웠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선은 '는'이라는 문자를 '도'로 고치고 그 존경하고 사랑하는 프리드리히에게서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다. 돌아오는 건 메시지보다는 확실한 것이었다. 진동해대는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진정시키고 귀에 가져다대면 들리는 건 확실히 기뻐보이는 그의 목소리였다.